Breaking Bias Supporting Famlies

아플 때 한국 가족은 어머니와 딸의 2인 가족이된다

박지니, 잠수함토끼콜렉티브 (대한민국)

올해 초 있었던 우리의 세 번째 섭식장애 인식주간(Eating Disorders Awareness Week)을
준비하던 중 내가 연자로 초대한 일본 연구자들의 논문에서, 지난 세기 말 그때까지
기정사실처럼 통용되었던 ‘섭식장애는 엄마 탓’이라는 관점과 서사를 일본의 페미니즘
사회학자들을 중심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는 구절을 읽고 나는 번갯불에 불 붙은 나무처럼
열의로 타올랐다. 그건 지금 당장 표면화시킬 주제였다.

왜냐하면, 자기의심 없이 목소리 높이는 일에는 편들 수 없는 삐딱한 나로선 흔히 어머니에
대한 분노로부터 자기서사의 정당성을 만들어내는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 서사에 매번 마음
편히 손 들어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김보람 감독의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을
함께 보는 자리에서 심리상담학도로 보이는 한 젊은 여성이 격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는 먼저 영화에 대한 내 의견을 묻고 싶은 듯 다가와 손짓을 했지만, ‘주인공이…
어머니한테 너무 착했어요!’라고 외마디 탄성을 지른 뒤엔 내가 아무리 캐물어도 말을 잇지
못했다.

모녀관계는 대부분 상처가 깊기 마련이며, 어머니가 연루된 비극의 기원과 복수, 구원의
서사는 일시적이나마 어떤 해방적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DSM의 정신과 진단명을
부여받는 것이 처음에는 자신을 ‘질병’으로부터 무고한 채 분리시키는 갸륵한 힘을
발휘하지만 얼마 안 있어 모든 정치적, 문학적 논의 가능성을 무화시키는 순환논리적 구속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어머니-신의 신화 역시 믿는 이에게 곧 반격하는 게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어머니와 잘 지내지 못한 건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내 어머니는 불행한 삶 속에서
자주 아팠고 우울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화나는 일이 있어도 차마 얘길 꺼내지 못했는데,
정말로 내 비난을 들은 어머니가 곧장 앓아 누우시는 것을 목격한 탓이었다. 스무 살 가을
자살기도 사건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침대 곁에 선 어머니는 울면서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말했고 나는 숨이 턱 막혀 고개를 홱 돌렸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회사생활을 시작한 뒤 꽤 오랫동안 나는 가족과 연락을 끊고
살았다. 삼십대의 내가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은 아마 없을지 모른다.

독립출판 붐이 한창이던 2018년, 운 좋게 어느 독립문예지에 내 어린시절 기억에 관한
에세이를 실을 수 있었던 나는 그 책을 집으로 부쳤고, 그해 여름부터 어머니는 매주
토요일마다 나를 보러 당일치기로 서울로 올라오셨다. 우리는 기차역 근처 샤브샤브

뷔페집에서 만나 배춧잎과 버섯을 산더미처럼 익혀 먹고, 나중엔 비좁은 카페 한구석에
맞붙어 앉아 얘기하고 울고 얘기하길 반복했다.

이제 마흔다섯이 된 나는, 몇 년 전만 해도 말도 안 된다 느꼈을 정도까지 부모님과
가까워졌다. 내가 점점 더 한 개인으로서의 권위를 갖고, 두 사람이 내게 더 이상 불합리한
공포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고, 또 우리 세 사람이 지금처럼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는 공통된 감각이 서로를 애틋하게 느끼게 한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속이 역해질 정도로 두려운 것은, 내가 깨달은 것과 획득한 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똑같이 해법처럼 전수한다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시할 때다. 나는 상담가도 그 어떤
전문가도 아니면서 섭식장애의 폭풍 속에 조난 당한, 고작 열 몇 살 된 여자아이와 그
어머니를 만나게 되지만, 내가 가진 것 중 그 어떤 것도 그들을 돕기엔 무력하다.

그러나 한데 묶인 이 두 사람들로부터 똑같은 사연을 들을 때, 나는 나 혼자 전투라도 벌이고
싶어질 정도로 분노에 떤다. 어머니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로 아이를 서울이나 대도시의
큰 병원에 입원시킨다. 그러나 한국의 종합병원에는 아마도 섭식장애를 다룰 줄 아는
전문가가 전혀 없고, 아이는 대개 하루 세 번 식판을 받고 ‘왜 먹지 않느냐’는 말만 듣거나 되도
않는 위협을 당하며 모든 권위에 대한 환멸 말고는 얻은 것 없이 집으로 보내진다. 게다가
어느 한 아이는 식사 중 바닥에 흘린 음식을 억지로 주워 먹어야 했다고 했다. 섭식장애
‘전문가’가 있는 병원에서였다. (‘의료’는 진단과 입원 처방까지인가? 아이가 어떻게 다시
식사를 할 수 있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은 여성, 혹은 이민자 여성 저임금 ‘돌봄’
노동자들의 일인가?)

그 아이는 많은 것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혹은, 신뢰를 져버린 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모든
것에 대한 변명으로 삼기 시작했다. 거식증적 강박을 포기해 보려 생각했을 때 자신을 지옥
같은 병원으로 처넣은 것은 어머니였다. “그래 놓고서 지금 와서 나한테 뭘 원하는 거예요?”
그 애는 악을 폭발시킨다.

“내가 먹는 것 못 봤어요? 노력하고 있는데 왜 잔소리를 해요? 저녁 먹으려고 했는데 엄마
때문에 입맛 다 잃었어. 들어가서 잘래요.”


그 애의 어머니는? 대꾸할 방법을 모른다. 전화 너머 어머니의 목소리가 빠르게 잦아들더니
어리둥절할 만큼 기어들어간다. 나는 어머님이 아프신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다만, 방에서 나온 딸이 통화 내용을 엿들을까봐 발화 자체를 포기해 버린 것이었다.


섭식장애에 관한 치료/지원 시스템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섭식장애로
미끌어진 십대 초반의 여자아이와 그 어머니는 국가가 관심 두는 몇 안 되는 카테고리에 들지
않는 다른 모든 사례에서처럼 ‘(2인) 가족의 비극’이라는 시나리오로 추락한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심리상담 서비스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심리상담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진 않으며 까닭에 지난 정권의 전국민 마음투자 지원사업은 저 고질적인 ‘가족의
비극’을 영영 ‘가족의’ 비극으로 내버려두겠다는 무책임의 반영일 것이다. 심지어 사업이

벤치마크 삼았다는 영국 IAPT(Improving Access to Psychological Therapies)는 “정신병적
질환, 양극성장애, 성격장애, 섭식장애” 같은 “심각한” 문제는 IAPT 라는 단기 인지행동요법
패키지가 아니라 그에 맞는 국가보건서비스에서의 지원 대상이라 밝히고 있다. 대한민국은?
일단 ‘심각한’ 문제를 얻은 개인과 가족이 문제다. 섭식장애는? 우리나라에서 섭식장애는
아직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자 않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2006년 전국민정신질환유병률조사
이후 무려 2021년까지 조사에서 섭식장애 항목이 누락됐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비극 속의 어머니와 딸 2인조 중에 어머니는 그래도
성인이니까 합리적인, 최선의 판단을 내리고 그렇게 행동해주길 기대한다. 그러나 이 기대는
너무 쉽게 어머니에 대한 윤리적 비판에서 뒤엉킨 채 끝나고 만다. ‘어머니’가 되었다고 해서
모든 성인이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인간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이번 세계 섭식장애 행동의 날(World Eating Disorders Action Day)의 주제는 ‘편견을
거두자(Break the Bias)’와 ‘가족을 지원하라(Support the Families)’이다. 개인적으론 이 같은
행사가 ‘모든 몸은 아름답다’라거나 우리 식으로라면 ‘나다운 아름다움’ 같은 속 빈 표어를
내세우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우면서도 감사하다.


90년대 중반 서울에 최초의 섭식장애 전문 정신과 클리닉을 개원했던 의사는 자신의 책에서,
당시 자신이 수련받던 일본 병원의 교수가 ‘곧 한국에도 섭식장애가 급증할 테니 준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고 쓴 적이 있다. 이때 필요했던 ‘준비’는 극도로 시장화된 한국
의료시장에서 눈치 빠른 의사들이 얼른 사업모델로 채택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수십년 동안
차고 넘친 ‘가족의 비극’에 또 다른 무서운 강줄기가 보태어지지 않도록 국가가 대대적인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었어야 할 것이다.

http://www.instagram.com/rabbitsubmarinecol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